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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반고흐,그를 기억하다

by efuchunsa 2021. 9. 7.

 

1. 짧고 비극적이었던 그의 생애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는 아버지가 목사인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태어나기전 죽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의 이름도 빈센트 빌럼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형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형 대신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독서를 좋아했고 미술적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듯 했습니다.

13살, 1866년 제벤베르헨에서 교육을 마치고 튈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로 진학하지만 1968년 3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는데 고흐에게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때문에 자퇴를 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1869년 화상 구필의 조수로 수습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판화를 수집하며 안목을 넓혀 갔습니다.

영국에서 잠시 교사생활도 하며 지냈고 네덜란드로 돌아와서는 목사가 되기위해 1878년에 브뤼셀의 신학교육과정에 등록하고 선교사로서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880년 화가가 되기로 하고 노동자 계급을 그리는 일을 시작합니다. 주로 누넨에서 제작 활동을 했는데 이때 대표작이 감자를 먹는 사람들 입니다.

1886년 파리로 이주하면서 반고흐는 전위적인 예술기류에서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페르낭 코르망의 작업실에서 만난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 카미유 피사로 등의 미술과 들과 친구가 되었고 빛의 효과들을 탐구하고 색채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동생인 테오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파리생활에 지친 그는 1888년 남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이때 15개월 동안 200점이 넘는 작품이 탄생합니다.

10월 고갱이 반 고흐의 노란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고 몇주간 작업을 같이 했었습니다.

이때  고갱이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고흐 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고갱의 그림 속의 고흐가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모습에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사건 이후 고갱과 사이가 나빠지고 병의 발작에 의해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고갱은 떠나가고 반고흐는 1889.5월 스스로 정신병원에 찾아가 치료를 받게 됩니다. 계속 되는 입원, 퇴원 생활을 되풀이 하다 1890년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했으나 같은해 7월 27일 근처 들판을 서성이다 권총으로 자살을 하게 됩니다. 이틀 후 반고흐는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후 테오도 고흐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2.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의 작품세계

고흐의 처음 그림은 유화라고는 하지만 기법상 소묘에 가까웠습니다. 아직은 혼자서 그림의 기법을 익혀 나갔지만 마음대로 되지않은 그림으로 인해 다른 화가의 도움을 받고자 했었습니다.

뇌넨의 헛간에서 그림을 그리기로 하면서 색채가 좀더 다양해지고 가족간의 사이도 좋아지는 시간이 됩니다.

하지만 마르호트 베흐만이 고흐에게 빠지게 되고 이 심각한 스캔들로 인해 고흐는 아인트호벤에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이때 그린 그림이 감자를 먹는 사람들인데 1885년 3월 우연히 농부의 집을 들어가게 되고, 이 때 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처럼 어둡고 칙칙한 것이 그의 초기 작품의 특징입니다.

이후 파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과학적인 방식으로 작품에 접근하며 빛의 효과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색채에 대해 깊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또 일본 목판화에 대한 관심도 발전시켰습니다.

남프랑스에서 밤의 카페 테라스, 열두송이의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 등의 작품이 태어났습니다. 

지금 알려진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입니다. 고흐는 론 강 유역의 밀밭과 포도밭, 운하, 밤의 거리 등을 걸으며 그 풍경에 빠져 있었고 이것이 색을 사용하는 특유의 기법을 발전 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색은 감정과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이 되었으며 붓자국들도 그의 작품을 표현 해 내는 기법이 되었습니다.

공동 화실인 노란집을 꾸미면서 해바라기 연작과 아를에 있는 반고흐의 침실을 그렸습니다.

1889년 정신변원에서 지내면서 붓꽃, 사이프러스가 있는 푸른 밀밭, 올리브밭, 별이 빛나는 밤 등을 그리게 되었지만 발작이 계속되어 힘들어 했습니다. 결국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리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3. 테오와 나누었던 편지

그와 동생 테오와 나누었던 편지는 그를 너무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그 편지만 해도 양이 어마어마 한데 무려 650여 통이라고 합니다. 테오는 이 편지를 죽을때 까지 보관했고 테오의 아내가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동생 테오는 형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았고 재정적, 정신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 주었으며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싸웠지만 두사람의 관계는 아주 가까웠으며 테오의 결혼 전 까지는 같이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당시 그가 어떤것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고흐는 파리에서 꿈꾸다 실패했던 화가들의 공동체 생활을 다시 꿈꾸며 동생 테오에게 고갱을 설득해 아를로 오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는 늘 외롭고 힘들었지만 동생 테오가 곁에 있었으며,  테오는 매달 150프랑을 보내며 형의 예술을 끝까지 지원합니다.

편지에는 때로는 한탄하고 위로를 원하며 작품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의지했던 동생 테오도 형이 죽자 우울증에 힘들어 하다가 1년후 생을 마감하게 되고 1914년 테오의 시신은 빈센트의 묘지 옆으로 이장되어 함께 있게 됩니다.